▲ 믿을 수 없는 잘록한 허리의 소유자. 사진=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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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근질닷컴] ‘펠레냐, 메시냐’, ‘조던이냐, 르브론이냐’, ‘박지성이냐, 손흥민이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포츠 스타들과 현역 최고의 스타들을 비교하는 이 절대 답이 나올 수 없는 논쟁은 끊기지 않는다.
보디빌딩도 마찬가지다. 미국 매체는 시대가 다른 보디빌더를 비교하는 투표를 열었는데, 가장 박빙의 승부는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hwarzenegger) VS 리 헤이니(Lee Haney)’였다. 이 투표는 보디빌딩 팬들의 최대 난제였고, 계속해서 이 재미난 논쟁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리 헤이니가 역대 최고의 재능이라는 말엔 아무도 이견이 없다.
역대 레전드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비교되는 보디빌딩 천재 리 헤이니. 그는 과연 누구인가?
▲ 현대 보디빌더의 교과서가 되어버린 리 헤이니의 등.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지금까지도 리 헤이니 같은 아름다운 역삼각형의 상체를 가진 보디빌더를 본 적 없다. 그는 은퇴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보디빌더의 이상향이자 롤모델이다”
리 헤이니가 슈워제네거와 비교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마의 8연속 우승’ 덕분이다. 리 헤이니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무려 8년 동안 왕좌의 자리를 지켰다.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슈워제네거의 7번 챔피언 기록을 넘긴 인물이기에 지금도 누가 더 뛰어난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다. 이 8번의 기록은 로니 콜먼이(1998-2005) 동률을 기록하긴 했지만, 29년이 지난 지금도 이 둘의 기록은 아무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위대한 기록이다.
리 헤이니의 어린 시절-남다른 롤모델
▲ 리 헤이니 고등학교 시절. 90도 인사해야 할 것 같은 동생이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역대 올림피아 선수들의 롤모델은 대부분 당대의 유명 보디빌더이었다. 하지만 리 헤이니의 동경 대상은 인간이 아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신이었다. 이 떡잎부터 남달랐던(?) 리 헤이니의 꿈은 그가 미래에 챔피언이 될 수 있게 만든 밑거름이 됐다.
리 헤이니는 12살이 되던 해 크리스마스날 가족들에게 아령을 선물해달라고 말했다. 그 선물 안에는 ‘트레이닝 가이드’가 들어 있었는데, 그 책자를 통해 웨이트 트레이닝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집에서 아령을 들면서 운동하던 리 헤이니는 지역 YMCA(바로, 그 ‘YMCA’다.) 운동 동아리에 가입했다. YMCA에 가입할 땐, 어떤 운동을 하고 싶은지 정해야 한다. 그때 대니 로져(Danny Rogers)라는 YMCA 선생님이 리 헤이니의 잠재력을 단번에 눈치채고 보디빌딩을 제안했다.
“너는 내가 살면서 본 체형 가운데 가장 완벽한 밸런스를 가지고 있다. 너는 보디빌딩을 해라. 너는 언젠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것 같다”
이후 대니 로져는 리 헤이니에게 제대로 된 운동법을 알려주고 훈련시켰다. 그의 타고난 재능은 노력이 뒷받침되자 빛이 나기 시작했다. 리 헤이니가 14살이 되던 1973년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청소년이 되어 버린다.
“하이스쿨에 다니는 동안 미식축구, 농구 등 많은 스포츠 종목에서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으니까. 하이스쿨 졸업 땐 미식축구팀이 있는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제시했지만 거절했다. 어떠한 제안도 내 보디빌더의 꿈을 꺾지 못했다”
리 헤이니의 보디빌딩 도전기
▲ 아마추어 대회 당시 리 헤이니.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어느 정도 기량이 됐다고 느낀 리 헤이니는 대회를 준비한다. 무대에 서는 방법도, 의상에 대한 정보도 몰랐던 그는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값 싼 속옷을 샀다. 그 속옷을 입고 출전한 ‘1975 Mr. South California Show’에서 그랑프리가 된다. 그의 나이 16살에 미국 남부 지역 최정상을 밟은 것이다.
리 헤이니는 훗날, 이 속옷에 대해 “무작정 슈퍼마켓으로 가서 아무 속옷이나 골랐다. 자칫하면 내 중요 부위(?)가 노출할 뻔했던 아찔한 기억이 있다”라고 전했다.
첫 대회 이후 짜릿함을 느낀 리 헤이니는 계속해서 훈련에 열중했고 근육은 더욱더 탄탄해졌다. 그리고 ‘1979 Teen Mr. America’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자신의 또래들을 제친다. 10대 미국 청소년 중엔 적수가 없었다.
이후 성인 무대로 넘어온 리 헤이니는 우상 헤라클래스의 기세를 떠올리게 했다. 압도적인 근질로 ‘1982 World Amateur Championships 1위’, ‘1983 Grand Prix Las Vegas 1위’ 등 아마추어 리그에서 그를 넘길 자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에 나는 꽤 얇은 허리와 넓은 등까지 좋은 비율의 몸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엄청났다고 정정하겠다.”
전설이 된 31살 리 헤이니
▲ 1991 미스터 올림피아 무대 위 리 헤이니. 사진=유튜브 캡처
“내가 존경하는 선수들이 섰던 무대에서 경기하는 내 모습을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내 방을 가득 채웠던 포스터의 주인공이 섰던 세르히오 올리비아가 섰던 그 올림피아 무대 말이다”
미전역에 자신을 알리고 프로카드를 거머쥔 리 헤이니는 23살에 그의 우상들이 섰던 ‘1983 올림피아’ 무대에 올랐다. 결과는 3위. 20대 초반의 청년 미스터 올림피아 첫 데뷔전 성적이 3위라니 엄청난 기록이다. 하지만 매번 시상대 단상 꼭대기에 섰던 리 헤이니에겐 낯선 등수였다.
“Teenage America 1위, Junior Nationals 1위, Universe 1위 등 언제나 일등이었던 내게 3등은 낯선 성적이었다. 그 이후는 모든 사람이 알다시피 내 등수를 다시 찾아갔다.”
보디빌딩 천재는 이를 악물고 훈련에 매진했다. 하늘이 내린 재능에 오기까지 뒷받침되니 다음 해 ‘1984 미스터 올림피아’에선 단점 없는 완벽한 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리 헤이니의 전설이 시작되는 한해였다.
▲ 1985 올림피아 무대 위 리 헤이니. 사진=리 헤이니 인스타그램
이후 리 헤이니는 무려 8년(1984~1991)간 올림피아 정상을 지켰다. 1991년 그는 마지막까지 완벽했다. 그해 돌연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 누구도 올림피아에서 리 헤이니를 꺾어보지 못한다.
은퇴할 때 그의 나이 고작 31살이었다. 리 헤이니가 은퇴 당시 기량은 전혀 줄지 않았기에 기록은 계속해서 써나갈 수 있었다. 나중에 어느 매체가 그에게 은퇴 이유를 물었다.
“지구의 지각과 핵 사이에 맨틀이 있다. 그 아래로 계속해서 들어가다 보니 더 이상 땅을 팔 자리가 없더라. 그러곤 느꼈다. 이제 다시 지구 위로 올라가서 새로운 싹이 필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 ‘신과 구의 연결고리, 이런 그림 어디서도 못보지’. 2019 아놀드클래식 이후 모인 전설들. 왼쪽부터 리 헤이니, 브랜던 커리, 로니 콜먼, 제이 커틀러. 사진=리 헤이니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