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로니 콜먼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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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근질닷컴] 로니 콜먼. 보디빌딩에 관심 없는 주변 친구들도 필 히스는 몰라도 로니 콜먼은 안다. 이 콜먼은 보디빌딩의 한 획을 그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동시에 로니 콜먼은 스타성이 확실한 보디빌더다. 콜먼이 미스터 올림피아로 군림하던 90년대 후반 미국에서 10000km 떨어진 이 한국에서조차 그의 사진이 헬스장에 도배됐으니 말이다. 전세계에 퍼진 첫 아이돌 보디빌더, 즉 보디빌딩계의 락스타였다.
2004년엔 한국 방송에도 섭외됐다. 방송에서 콜먼은 대중목욕탕에서 한국 목욕 문화를 체험했다. 때를 밀릴 때 아프냐는 카메라맨의 질문에 간지럽다고 코웃음 치는 장면은 지금 봐도 아주 신선한 장면이다. 한국 방송에 나온 거구의 사내는 언뜻 보면 같은 동네 옆집 형 같지만, 한국을 방문했던 시기에 콜먼은 부동의 미스터 올림피아였다.
콜먼의 현재는 비극 그 자체다. 콜먼은 과도한 중량 운동과 약물 복용 그리고 유전적인 영향으로 고관절과척추가 다 망가졌다. 결국 콜먼은 척추 수술로 인해 더 이상 걷지 못하는 비운의 보디빌더가 됐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 콜먼이다. 그렇기에 본인이 가장 비관적이고 슬플 것 같지만, 그는 자신의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후회하냐고? 내가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바꾸고 싶냐고? 한가지 바꾸고 싶은 건 있지. 350kg 스쿼트를 2세트 했었는데, 4세트로 하고 싶어. 그게 내 커리어 중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야”
▲ 사진=로니 콜먼 인스타그램
전설 로니 콜먼의 어린 시절
▲ 1989년 로니 콜먼. 사진=로니 콜먼 인스타그램
로니 콜먼은 타고난 스포츠맨이었다. 고등학교에선 미식축구에 재능을 보였다. 타고난 피지컬과 힘을 가진 선수로 지역내에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콜먼은 그 유명세를 지키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힘이 늘어나는 만큼 미식 축구 실력도 급속히 늘었다. 그 결과 그램블링 대학교(Grambling State University)에서 회계전공의 미식축구 선수 장학생을 제안했고, 콜먼은 이를 수락한다.
4년 뒤 대학을 졸업한 콜먼은 직업을 구하기 위해 텍사스로 이주했다. 마땅한 일을 못 구한 그는 도미노 피자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행복하진 않았다.
“도미노 피자 배달원은 내 인생 가장 힘든 직업이었지. 앞으로 평생 거기서 일하게 될까봐 두려웠어. 하지만 나는 더 큰 일을 하게 될 사람이라고 나를 믿고 있었어”
경찰이 된 차기 미스터 올림피아
▲ 로니 콜먼 경찰 시절. 사진=로니 콜먼 인스타그램
로니 콜먼은 우연히 신문에서 텍사스 경찰을 뽑는다는 소식을 보게 된다. 그 즉시 지원한 콜먼은 1989년 25살에 경찰 배지를 단다.
경찰서는 콜먼이 운동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근무 후 경찰서 안에 있는 체육관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체육관 안에 있는 모든 무게의 기구를 다 섬렵해버린다.
경찰서 체육관엔 더 이상 콜먼을 만족시켜줄 기구가 없었다. 더 무거운 아령을 원했던 콜먼은 경찰서 바깥에 있는 브라이언 돕슨(Brian Dobson)이 운영하는 사설 체육관을 끊었다. 브라이언은 체육관을 신청하러 온 콜먼의 몸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콜먼, 당신에게 잠재력이 느껴져요! 텍사스 지역 보디빌딩대회를 목표로 나와 운동하는 건 어때요? 수락한다면 체육관 요금은 평생 무료로 해줄게요”
콜먼에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체육관은 큰 이득이었기에, 제안을 수락하고 돕슨과 트레이닝을 시작한다. 훗날 콜먼은 브라이언이 없었다면, 자신은 올림피아가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발전의 시기
▲ 1991년 로니 콜먼. 사진=로니 콜먼 인스타그램
로니 콜먼은 브라이언 돕슨과 1990 미스터 텍사스 대회에 참가한다. 그의 인생 첫 대회에서 운동을 알려준 브라이언 돕슨은 제치며 헤비급 체급 1위와 오버롤을 손쉽게 입상했다. 이 첫 대회에서 콜먼은 자신의 잠재력을 몸소 느꼈다. 이에 한 번 더 대회에 도전하고 싶어진 콜먼은 ‘1990 NPC Texas Championships’에 참여하고, 3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여기서 콜먼은 자신의 근육량을 더욱 더 높여야 경쟁력이 있다고 깨닫는다. 그다음 해인 1991년 폴란드에서 열린 ‘1991 World Amateur Championships’ 에서 당당히 1위에 입상하고 프로 카드를 거머쥔다. 그의 나이 27살, 보디빌더 데뷔 2년 만의 일이다.
이후 승승장구했을 것 같은 콜먼이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에겐 분명 ‘발전의 시기’가 필요했다. 3년 차 선수에게 프로 무대는 절대 쉽지 않은 곳이었다. 프로 데뷔 후 첫 대회 1992 Chicago Pro Championships’에선 밥 패리스(Bob Paris), Kevin Levrone(케빈 르브론) 등에 밀려 11위란 초라한 성적표를 받는다.
1992년부터 94년까지 10개 이상의 대회에 참가한 콜먼의 최고 성적은 고작 3등이었다.
꿈의 무대 올림피아
▲ 로니 콜먼 미스터 올림피아 시절. 사진=로니 콜먼 인스타그램
프로의 자격을 얻은 로니 콜먼은 미스터 올림피아 도전을 시작한다. 항상 최고였을 것 같은 로니 콜먼이지만 1992년 첫 도전은 순위권에 들지도 못했다. 그 후로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1994년 도전은 15위, 1995년 10위, 1996년 6위, 1997년 또한 6위.
하지만 콜먼은 이 과정을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스펀지처럼 경험을 흡수한다. 그렇게 빨아드린 경험을 1995년부터 물처럼 쏟아냈다. 로니 콜먼이란 괴물이 점차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31살의 콜먼은 Canada Pro Cup에서 훌륭한 근질로 첫 프로 1위에 입상한다. 이 승리로 보디빌딩계는 그를 주목한다. 1997년에 열린 The Russian Grand Prix에선 92년도에 넘지 못했던 케빈 르브론을 제쳤으니 그의 근질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올림피아 무대엔 더 이상 이 완성된 보디빌더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1997년 도리안 예이츠는 은퇴했다. 왕좌의 자리를 떠난 시기에 콜먼은 괴물이 되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적수가 없었다. 그랑프리, 올림피아까지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휩쓸었다. 2001년엔 보디빌더 최초 아놀드 클래식과 올림피아 트로피를 동시에 들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8개의 올림피아 트로피의 주인공이 된다.
*2006년 그를 끌어내린 보디빌더는 제이 커틀러(Jay Cutler)였다. 제이 커틀러는 2000년부터 상위 빌더로 두각을 나타냈다. 커틀러는 벽이었던 콜먼을 2006년에 결국 뛰어넘는다.
▲ 로니 콜먼 은퇴 무대. 사진=로니 콜먼 인스타그램
커틀러에게 패배한 로니 콜먼은 2007년 올림피아 무대를 끝으로 보디빌더 은퇴를 선언한다.
“9월 29일 올림피아에 서는 마지막 날이다. 내 가족, 친구, 항상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올림피아 타이틀에 대한 꿈이 없었다면, 난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Yeah buddy, Light weight baby!
▲ 효자손 아니다. 아령이다. 사진=로니 콜먼 인스타그램
로니 콜먼은 1000kg 가까운 레그 프레스, 데드 리프트, 스쿼트 360kg 등 믿기지 않은 고중량을 고반복 했다. 그 무게를 들면서 외쳤던 “Yeah buddy, Light weight baby!”는 콜먼의 시그니쳐 사운드가 됐다. 미친 무게를 가볍다고 외치는 그의 모습에 지금도 많은 팬들이 영상을 보면서 존경 댓글을 달곤 한다.
하지만 콜먼도 괴물이 아닌 인간이었다. 이런 초고중량 반복 운동은 그의 고관절과 허리에 큰 무리를 줬고, 결국 최근 인공고관절을 투입하는 대수술을 했다.
▲ 휠체어 탄 로니 콜먼. 사진=로니 콜먼 인스타그램
이제 콜먼은 더 이상 레그 프레스를 하지 못한다. 심지어 휠체어 없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그 고강도 운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트를 늘리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는 콜먼을 보면 정말 보디빌더란 천직은 따로 있는 것 같다. 휠체어를 타고도 콜먼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아령을 드는 영상을 올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콜먼은 비운의 선수이다. 하지만 콜먼의 전성기와 노력을 아는 팬들은 아직도 그를 역대 최고의 보디빌더로 꼽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