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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원 사단 문제아 이정인 “후배들 길 열어 주고 파”

등록일 2019.12.06 17:31 youtube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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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병정 기자

 

[개근질닷컴] “나는 문제아였다. 보딜빌딩계의 발로텔리랄까...”

 

강경원을 빼놓고 대한민국 보디빌딩 역사를 얘기할 수 있을까? ‘전국체전 15회 우승’, 대한민국 최초 IFBB 유로파게임 우승, 아놀드 클래식 오버롤 우승, IFBB PRO 획득이란 역사는 그의 영광의 이정표다.

 

리빙레전드의 전설은 이제 새로운 세대에도 유효한 현재진행형이다. 강경원의 유튜브 구독자 숫자는 어느덧 10만 명을 넘었다. 강경원은 다시 또 다른 아이콘이 됐다. 보디빌딩계를 넘어 일반 대중들까지 그가 나온 영상에 뜨거운 환호를 보낸다. 전설은 여전하다.

 

그리고 이정인은 2006년부터 올해까지 13년간 파트너이자 후배로 강경원과 전설의 순간을 함께 했다. 단순히 ‘스승과 제자’란 표현으로도 그 둘의 인연을 설명하긴 어렵다. 13년의 관계는 어느덧 존경과, 친애와 우정을 넘어 함께 해야 하는 가족이 됐다.

 

한때 Mr.인천에 올라 불과 20대에 전국체전 무대를 누볐던 이정인은 ‘내가 빛날 시기는 이미 놓쳤다’고 덤덤히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믿고 따르는 동생들이 자신의 길을 통해 빛이 났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우상’인 강경원의 길을 함께 따르며, 자연스럽게 또 누군가의 길잡이가 됐다. 그는 이제 최연소 IFBB PRO 김정현의 든든한 스승이다.

 

인터뷰 내내 ‘굴곡 많은 삶을 살아왔다’며 천연덕스럽게 웃는 얼굴.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마냥 낙천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이정인은 낙천적인 성격만큼이나 ‘불’같은 성격도 있다고 했다. 싸웠고, 사고도 쳤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늘 강경원이었다.

 

“‘내 존재가 괜히 강경원 형님께 피해를 주지 않을까’라고 고민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인간 이정인’으로 따뜻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감사하다.”

 

*마리오 발로텔리 – 이탈리아 리그, 대표팀 최연소 골을 모두 갈아 치운 천재 공격수, 하지만 세기의 재능이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각종 기행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축구계 대표 악동이자 악마의 재능으로 불린다.

 


사진=이정인 SNS

 

운명, 강경원과의 13년의 인연

 

이정인과 강경원의 첫 만남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를 방불케 했다. 2000년도에 고물상을 운영하던 이정인의 아버지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한 아들에게 파지로 들어온 한 머슬잡지를 건넸다.

 

잡지엔 그 당시 인기가 절정이었던 강경원의 사진이 도배되어 있었다. 청년 이정인은 그 모습에 반해 가방 하나만 달랑 메고 강경원의 헬스장으로 찾아갔다. 영화 같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한 계기는?

 

보디빌딩을 시작한 계기는 다들 비슷할 것 같다. 대부분 ‘멸치’인 몸이 싫거나 살을 빼기 위해 시작한다. 나도 그랬다. 학생 때 굉장히 말랐었다. 그래서 고3 수능이 끝나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땐 마냥 권상우처럼 ‘몸짱’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헬스장에 등록했다.

 

얼마나 말랐었나

 

53kg 정도. 학창 시절 내내 키가 작고 마른 학생이었다.

 

보디빌더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내 아버지는 고물상을 운영하셨다. 운동하는 내 모습을 본 아버지가 어느 날 파지로 들어온 머슬 잡지를 갖고 왔다. 99년, 2000년도쯤 나온 잡지였는데 거의 다 ‘강경원 형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당시가 (강)경원 형이 미스터 코리아를 했던 시기라 인기가 상당했다. 단순히 몸을 키우려고 웨이트 트레이닝만 하던 내가 보디빌더란 꿈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사진=김병정 기자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그 당시는 입대 전이었다. 이분(강경원)에게 가서 운동을 배우려면 병역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고민하던 차에 방위산업체가 눈에 들어왔다. 방위산업체를 다니면 운동도 하고 군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위산업체에 가려고 산업인력공단에서 인정하는 자격증을 땄다. 그 자격증을 따기까지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경원 형이 당시에 헬스장을 오픈했었다. 근처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가방 하나 들고 무작정 형을 찾아갔다. 그때가 2006년이었다.

 

찾아가자 마자 바로 OK였나?

 

아니다(웃음). 그 당시가 경원 형이 도하아시안게임 국가대표 합숙 훈련을 하던 시기였다. 갔는데 형의 첫 마디가 “너 나에게 P.T(Personal Training)를 받겠다고 찾아온 거니, 아니면 내 밑에서 운동하겠다고 찾아온 거야?”라고 물으시더라. 그때 경원 형 품으로 들어가야 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선 차근차근 운동을 배웠다. 사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을 때라 P.T 받을 여유도 없었다. 그때 P.T라는 시스템이 그렇게 자리 잡았을 때가 아니었다. 당시에 P.T는 사회특권층을 위한 시스템이었으니까.

 

그래서 체육관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나

 

경원 형이 태릉 선수촌에서 합숙 훈련을 했을 시기라 체육관 운영은 후배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배가 운영이 잘 안 되니까 체육관을 나에게 맡기고 그만둬버린 거다.

 

정말?

 

그래서 그때부터 계획에도 없이 일을 시작했다. 새벽 6시에 문 열고 밤 11시에 마감까지 맡아서 했다. 거의 헬스장에서 살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먹고 자고 생활했다. 그 앞에 계약한 원룸이 하나 있었지만, 혹시 일어나지 못해 체육관을 열지 못하면 쫓겨날까 봐(웃음), 아예 집에 가지 않았다(웃음). 밤이 되면 헬스장이 엄청 추웠다. 나밖에 없는 곳인데, 거기서 난방을 빵빵하게 틀 수는 없으니까. 옷을 엄청 껴입고 소파에서 잠을 자곤 했다.

 

후일담이지만, 경원 형은 도하 아시안게임 치르고 오면 당연히 내가 헬스장에서 나갔을 줄 알았다고. 나처럼 운동 배우겠다고 찾아왔다가 얼마 못 버티고 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당연히 내가 이미 떠났을 거로 생각했다. 도하로 출국하기 직전에 헬스장으로 전화가 왔는데, 경원 형이었다. 그때 뜬금없이 내가 전화를 받아서 계속 헬스장을 관리하고 있다고 하니까 엄청 놀라더라(웃음). 형이 ‘너 아직도 안 갔냐’고 묻기에 ‘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의외라 놀란 건가(웃음)

 

우선 경원 형이 ‘원래 체육관 관리하던 후배들은 다 어디 갔냐’고 묻더라. ‘장사 안된다고 내게 맡기고 전부 나가버렸다’는 내 말에 형님이 ‘내가 도하에 갔다 오면 너 잘 챙겨줄 테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말하셨다. 그렇게 우리 인연이 시작됐다.

 


▲ 사진=김병정 기자

 

그 당시 몸은 좋았나

 

전혀. 완전 좋지 않았다. 멸치 시절까진 아니어도 운동을 아주 조금 했던 시기였다. 그래도 나 같은 경우엔 운동을 곧잘 배웠고 금방 근육이 붙는 체질이라 남들보다 성장은 빨랐다. 한 70kg 정도였던 시기다.

 

경원 형이 미국 가기 전까지 파트너로 쭉 같이 있었다. 근데 파트너라는 표현은 사실 엘리트 종목에서 선후배 사이가 쓰기에 예의가 없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선후배로서 형님이 미국에 가기 전까지 운동을 같이했다.

 

이정인의 커리어를 소개한다면

 

내가 참가한 첫 대회는 2008년에 여수에서 열렸던 ‘Mr.YMCA’ 였다. 당시에 -70kg 체급에 참가해 3위를 기록했다. 다음 해 같은 대회에서 -75kg으로 체급을 올리고 2위를 했다. 2010년도엔 Mr.인천 -75kg 2위, 또 이듬해 Mr. 인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2012년부터 전국체전을 뛰기 시작했다. 당시 -75kg에서 6위를 했다. 그리고 3년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그리고 2015년 전국체전 -80kg 에서 6위를 했다.

 

공백 기간은 어쩌다가

 

그 당시 협회와 내가 뛰던 실업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나는 경원 형과 함께 협회 쪽 사람으로 분류됐었고. 내 소속팀이었던 그 실업팀은 전국 단위 대회인 ‘Mr.코리아’, ’전국체전’, ’Mr.YMCA’ 성적을 같은 실적으로 평가했다. Mr.YMCA 3등과 전국체전 3등을 똑같이 보는 거다. 엄연히 레벨이 다른데. YMCA에서 3위를 하면 재계약 요건이 되는데 전국체전 6위는 요건을 못 채운다. 그때 당시 (전국체전은) 8위까지 점수가 있었다. 협회나 업계에서 전국체전 6위는 칭찬하는 성적이었지만 소속팀에선 ‘나를 자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 였다.

 

계기라고 판단한 근거가 있나?

 

있다. 그래서 소속팀 감독님에게 이적 기간에 다른 실업팀으로 이적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말을 전했다. 하지만 감독님은 ‘넌 우리랑 같이 가야 한다’고 말을 하더라. 근데 실업팀 간 이적 기간이 끝나고 예고 없이 나를 잘랐다.

 

아…

 

그때 운동에 대한 회의감이나, 이 업계에 대한 실망감을 엄청 느껴서 여길 떠났다. 그러고 나서 시작한 일도 잘 안됐다. 이후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쭉 지켜 본 경원 형이 날 불러서 다시 운동을 시켰다. 사실 마음속으로 선수의 길은 많이 내려놓은 상태였는데. 그러던 중 2014년도에 형님이 새로운 꿈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미국에서 선물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어떤 선물이었나

 

충북보디빌딩협회 이영관 실무부회장님을 소개해줬다. 이영관 부회장님은 경원 형에 대한 신뢰감, 그리고 내 잠재력만 믿고 최근 경기 실적도 없는 나를 충북대표 선수로 선발해줬다. 그래서 2015년도에 기적적으로 다시 충북도민체전과 전국체전에 출전할 수 있다. 딱 3년 만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정말 열심히 다시 준비해서 충북도민체전에서 -85kg 2위, 전국체전에선 -80kg 6위를 기록했다.

 

2012년과 비교해서 체급을 올렸는데

 

그땐 그 체급에서 뛸 수 있었으니까. 2012년까지 소속 실업팀에선 계약 체중이 -75kg이었다. 하지만 나는 원래부터 -80kg에서 뛰고 싶었고. 2012년 당시 감독님께선 나보단 다른 선배 선수를 택했다.

 

이유는?

 

소위 말해 라인이 달랐으니까. 거슬러 올라가면 더 윗선에서 파벌이 존재했다. 외부에선 경원 형이 인천을 상징하는 선수처럼 비춰졌을지 몰라도, 실제론 내부에선 회장님들 사이에서 지지하는 선수가 서로 달랐다. 그런 까닭에 나는 ‘경원 형 라인’으로 분류가 됐으니까. 나까지 영향을 받은거다.

 

3년만에 선수로 다시 뛰었을 때 기분은

 

너무 행복했다. 사실 그 당시 사업도 잘 됐던 시기였다. 그래서 남의 눈치를 많이 안 봤다. 또 이영관 실무 부회장님이 편하게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 나에겐 정말 감사한 분이다.

 

그렇게 됐지만, 계약한 연봉 자체는 엄청 깎였다. 보디빌딩 전국체전 점수가 낮아지면서, 실업팀들이 없어지고 보디빌딩계가 전체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연봉이 반도 아니고 반의반으로 줄었다. 선수에만 전념하기엔 비전이 없는데, 반면에 사업은 번창하니까. 개인적으로 아이러니가 있었다. 결국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선수 생활에 소홀해지더라.

 

그렇다면 사업 얘기를 안 들어볼 수 없다

 

강남에서 센터를 운영했다. 그때 김사라, 심민정 등 당시 좋은 성적을 냈던 여자 선수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UFC 대표 파이터인 정찬성 선수까지 회원이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회원이 많았다. 사업 쪽으론 잘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게 얼마 못 갔다. 갑자기 점점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 사진=김병정 기자

 

어쩌다가?

 

내가 헬스 산업이나 이 시장을 너무 몰랐다. 나는 ‘전국체전을 뛰는 선수’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대중은 그 가치를 ‘아무도’ 모르더라. 반면 ‘머슬마니아, 나바’ 등의 사설 단체를 뛰는 선수들의 인기가 당시 더 높았다.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선 대중적으로 친숙한 그 대회에서 성적이 난 선수들에게 수업을 받고 그 장소를 가려고 하더라. 그렇게 수업을 받던 사람들도 운동에 대한 니즈가 더 생기면 조금 더 전문적인 엘리트 선수들을 결국 찾게 된다. 하지만 엘리트 선수에겐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비싼 수업료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업계 시장의 현실이 그렇다.

 

정찬성은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나

 

찬성이가 부상을 당했을 때 재활을 도와주는 병원이 있었다. 나와는 스트렝스(Strength) 훈련을 함께했는데, 그 당시에 찬성이는 식단에 대해선 잘 몰랐다. 무조건 빼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식단 조절과 웨이트트레이닝의 베이스를 나와 같이 설립했었다. 지금도 가족같이 지내고 있다.

 

헬스장 시절 회원들의 인연이 다양한 것 같다

 

의외겠지만, 회원 중엔 머슬마니아 PRO인 황철순 형도 있었다. 그 형은 자기 헬스장을 운영하는데도 본인 집 앞이라고 내 체육관에서 와서 또 운동하는 형이었다. 철순 형은 우리 체육관뿐만 아니라 자기 일정 중에 시간이 맞으면 운동할 수 있도록 여러 군데 다 끊어 놓고 운동한다. 겉으로 비춰지는 모습만 보고 대중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운동을 열심히 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정인의 목표가 궁금하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많이 고민하고 있다. 피트니스 시장에 대한 전반적인 사업을 하고 싶다. 물건을 파는 일을 잘 하진 않는다. 하지만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목표다. 선수 육성에 대한 계획도 있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개인사의 굴곡이 있어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다(웃음). 만약에 선수로 뛰게 된다면 외국 대회에 도전하지 않을까?

 

굴곡?

 

내가 문제아다(웃음). 약간 해외 축구의 발로텔리 같은 보디빌딩계의 문제아.

 

그렇다면 이 질문을 해보고 싶다. 여러 사고를 칠 때마다 강경원 선수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마이크 타이슨의 스승이자 은사인 커스 다마토란 사람이 있다. 타이슨이 감옥만 50번 들락날락하고 있을 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재능을 알아보고 양자로 받아들여서 그를 최고로 끌어준 사람.  

 

내겐 경원 형이 그런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운동 선배를 떠나 내겐 내비게이션 같은 존재다. 죄송하고 감사한 부분이 정말 많다. 내 존재가 괜한 피해를 주지 않을까. 고민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경원 형은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고 ‘인간 이정인’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기 때문에 늘 감사할 뿐이다.

 


▲ 한국인 최연소 IFBB PRO 김정현(왼쪽)과 이정인(오른쪽). 사진=김병정 기자

 

이정인의 꿈은 무엇인가

 

예전의 난 ‘내가 환하게 빛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시기를 놓쳤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한국인 최연소 IFBB PRO가 된 (김)정현이 같은 동생들이 내 옆에 있다. 이젠 내가 빛나기보다 그 동생들을 빛나게 하는 역할이 되고 싶다. 나를 믿고 따르는 동생들이 돈도 많이 벌고 선수로서 원하는 레벨의 무대에서 계속 뛸 수 있게끔 내가 앞에서 끌면서 길을 만들어 주고 싶다.

 

길을 만든다?


이 운동 하는 친구들의 특징이 그렇다. 운동에만 집중할 뿐, 먼저 나서서 길을 찾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 착한 동생들이 마냥 선배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역할이 아닌 자신들이 더 빛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힘들긴 하지만 그건 내게 굉장히 보람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보람이라

 

(밝게 웃으며) 사실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저 내 목표를 말하자면 나를 따르고 있는 동생들을 잘 이끌고, 앞으로도 경원 형을 잘 모시고 싶다. 재능있고 노력하는 이들이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 편안하게 운동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다.

 


▲ 왼쪽 김정현, 가운데 이정인, 오른쪽 심정진. 사진=이정인 인스타그램

 

앞으로 길을 동행하고 싶은 후배가 있다면

 

IFBB PRO 김정현과 NABBA 에서 뛰는 심정진. 정현이 같은 경우엔 고등학교 1학년 때 찾아왔다. 그때 손을 내밀어 지금까지 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느낀다. 뭐랄까. 운동선수로서 싹수가 있었다. 성실하고 운동을 잘하더라. 그래서 경원 형에게 부탁해 전문적인 케어를 시작했다. 정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미스터 코리아, Mr. 인천, 전국체전까지 출전해서 그해 다 1등을 했고, 그래서 한국체육대학교 특기생으로 가게 됐다.

 

나 또한 그런 최정상 엘리트 코스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대중이 알만 한 최정상급 선수들은 다 그런 코스를 밟았다. 경원 형, 이진호 형, 김준호 선배님, 박경모 형까지 다 그런 시기를 거쳤던 분들이다. 나는 늦게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걸 이루지 못했는데, 정현이는 그걸 실제 해냈을 때 마치 내 일처럼 정말 기분이 좋았다. IFBB PRO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 사제 동반 IFBB PRO가 된 강경원과 김정현. 사진=이정인 인스타그램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정현이가 군대를 갔다 오고 제대한 올해 ‘한국 대회를 뛸지, 외국으로 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러다 경원 형, 정현이와 상의한 끝에 미국에서 도전해보자고 결정했다. 정현이의 향후 진로는 경원 형과 계속 논의하면서 ‘새로운 길’을 같이 만들어 가는 중이다. 경원 형이 한국에 있을 때 막내로 있었던 후배가 정현이다. 경원 형에겐 마지막 제자인 셈이다. 그리고 정현이가 나와 아직까지 함께 하고 있으니 여러 부분 신경 써주신다. 경원 형께 정말 감사드린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정현이는 우선 내년 외국에서 열리는 IFBB PRO 대회에 출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정현이가 선수로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게 체계적으로 준비하겠다. 이젠 나를 따르는 이들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고 싶다.

허준호 (hur.jh@foodnamoo.com) 기자 
<저작권자(c) 개근질닷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등록 2019-12-06 17:31:42 
허준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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