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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호날두’ 꿈꾸던 강보훈, 보디빌딩 챔피언 되다①

등록일 2021.04.01 17:50 youtube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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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강보훈

 

[개근질닷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동경했던 촉망받는 공격수 출신 축구선수 강보훈의 첫 번째 꿈은 부상으로 꺾였다. 하지만 열정과 의지, 두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만큼은 한 번도 꺾인 적이 없다.

 

그리고 이제 강보훈은 두 번째 길에서 다시 최고를 향해 뛴다. 바로 최고의 보디빌더다.

 

그렇다면 현 시점 보디빌딩계에서 ‘호날두’와 ‘메시’같은 최고의 스타는 누구일까. 대중에게 묻는다면 아마 10명 중 절반 이상은 김강민을 꼽을 것이다.

 


사진=김병정 기자

 

NABBA 3연속 챔피언이란 이력을 차치하고서도, 현 시점에서 남녀 선수를 통틀어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김강민은 명백하게 현 시대 보디빌딩의 아이콘이다.

 

그리고 그의 길을 묵묵히 뒤따르며 차세대 보디빌딩계 NO.1을 꿈꾸는, 그리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2021년 PCA 안산 클래식보디빌딩 그랑프리 강보훈이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스승 김강민은 코치를 떠나 인생의 멘토.”

 


사진=강보훈

 

자기 소개

 

인천 부평 머슬프로짐에서 근무하고 있는 강보훈 트레이너라고 한다.

 

보디빌딩 커리어는?

 

2018년 탱크콥스 대회부터 출전하기 시작해서, 주로 NABBA 코리아 대회를 위주로 뛰었다. 2019년 스포엑스 나바 WFF 아시아 오픈 클래식에서 피트니스 클래스 부문으로 첫 1위를 했고, 2021년 PCA 안산 클래식보디빌딩에서 처음으로 그랑프리에 올랐다.

 

생애 첫 그랑프리 소감이 궁금하다

 

사실 체급 1위까지는 욕심을 냈지만 그랑프리는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랑프리는 김강민 대표님이나, 다른 선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봐도 ‘정말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겐 아직 멀기만 한 단어로 느껴졌다고 해야할까.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수상을 하게 돼서 지금도 믿기지 않고 얼떨떨하다.

 

당일 언제쯤 그랑프리를 예감했나

 

솔직히 말씀드리면…보디빌딩은 기대를 하지 않았고, 클래식보디빌딩은 대기 때나 무대 위에서 ‘한 번 도전해 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컨디셔닝 부분에서 준비를 잘 했구나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진=김병정 기자

 

컨디션이 실제 굉장히 좋아보였다

 

4시즌 동안 대회를 준비하면서 막바지 기간은 항상 쉽지 않았는데, 올해는 오히려 가장 편안한 일주일이었다.

 

어째서?

 

이전에는 마지막까지 극한의 밴딩을 하고, 탄수화물을 줄이고 유산소 운동 강도를 많이 늘렸었다. 그런데 올해는 마지막까지 운동 루틴과 식단을 유지하면서 유산소 운동 강도를 전 대회보다 확 줄였다. 그보단 근막 마사지, 운동 후 케어 등에 더 신경을 썼는데, 그게 효과를 본 것 같다.

 

수상 후 김강민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그 눈물은….1년 365일 중에서 약 350일 정도는 김강민 대표님과 항상 붙어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좋은 일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일도 있었고, 제가 대표님게 실망을 안겨드린 일도 있었다. 그 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안 좋았을 때마다 항상 좋은 말씀을 해주고, 내가 사람으로서 성숙해지고 변화할 수 있도록 마치 아버지나 친형처럼 대해 준 김강민 대표님이 생각나더라.

 


사진=강보훈

 

트레이닝 코치를 넘어서 인간적인 면에서의 스승이기도 할까?

 

그렇다. 또 솔직히 경영자의 입장에서 직원이자 트레이너인 나를 포기하거나 무관심할 수도 있었는데, 늘 챙겨줬다. 김강민 대표가 외부에서 비춰지는건 ‘상남자’ 같은 이미지가 있지 않나.

 

그렇다(웃음)

 

그런데 실제로는 ‘츤데레’라고 해야 할까. 오히려 저보다 먼저 연락하고 챙겨주시고 굉장히 세심한 편이다. 그런 부분 때문에 대표님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제일 먼저 그런 일이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내가 이 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분이기도 하니까.

 

‘인생의 멘토’란 표현도 기억에 남는다

 

사실 제 전완근 바깥쪽에 부모님 생년월일과 김강민 대표님 성함을 타투로 새겼다. 절대 가볍고 쉬운 마음으로 했던 게 아니다.

 

수상 후 사제간에 나눈 이야기도 궁금하다

 

대회를 정리한 이후에, 따로 전화를 드렸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오히려 대표님께서 ‘수고했고, 고생했다. 나는 니가 좋아서, 널 생각해서 열심히 준비하는 걸 도와준 것 뿐’이라고 말씀하시니까 또 울컥했다.

 

(웃으며) 혹시 김강민 선수도 울었나?  

 

(진지하게) 아니다. 우리 대표님은 절대 울지 않는다. 그런 분이 아니다

 


사진=김병정 기자

 

대회장에 왔던 어머님께도 고마움을 표현했는데

 

엄마가 연세가 조금 많으시다. 둘이서 지금 살고 있는데, 위로 누나 2명과 13살, 9살 차이니까 늦둥이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예전에 축구 선수를 했을때도 어머니와 누나들이 다 뒷바라지를 해줬다. 그리고 성인이 돼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느꼈다. 아니 그제서야 알게 된 거다.

 

?

 

‘아 이게 아무리 자식이고, 가족이라도 타인의 꿈을 그렇게 지원해주는 게 절대 쉽지 않을 일이구나’라고. 축구선수부터 이날까지 항상 뒷바라지하고 응원해준 엄마의 헌신이 떠올랐다.

 

열심히 응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랬나. 반대로 나는 대회 당일날 엄마를 피했다.

 

왜?

 

사실 지난해 체급을 올리려는 무리한 욕심 때문에 대회 출전 이후 처음으로 순위 TOP6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러면서 커리어에도 공백기가 생겼다. 굉장히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 때문에 무너지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실패를 거름 삼아서 더 일찍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독하게 준비했다. (어머니를 보면) 그런 마음들이 무너질까봐…

 

사진=김병정 기자

 

준비 기간에도 주변에 소홀해지는 사례가 많더라

 

맞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가족들에게 예민해진적도 있었다. 또 준비하면서 새벽 일찍 나가서 밤 늦게 들어오다보니 서로 잠시 스쳐만 지나가는 모자간의 시간을 몇 개월 보냈다. 그런 부분에서 죄송한 마음이 컸다.

 

SNS 사진에서도 메달을 들고 환히 웃고 계신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시곤 한다. ’내 자식이어도 마치 남의 자식처럼 대단하다고. 어쩜 이렇게 독하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항상 ‘보훈아 제발 조금만 쉬어라. 쉬엄쉬엄 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축구를 할때나 지금이나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것들을 쉬면서 할 수가 없더라.

 

잘 된 자식의 모습보다, 힘든 과정이 더 눈에 밟히셨나보다

 

사실 축구를 그만둔것도 부상때문이었으니까. 더 그랬을 것 같다.

 

축구는 얼마나 했나.

 

일반적인 경우보단 늦게 시작한 편이다. 대부분 초등학교 2~3학년때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6학년으로 진학하기 직전에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런 이유로 그때부터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2배로 더 해야 한다’는 것으로 운동성향이 바뀐 것 같다.

 

어머니는 강보훈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첫 번째 팬이다. 사진=강보훈

 

포지션은?

 

줄곧 센터포워드로 뛰었다.

 

오! 그러면 축구를 잘한 편이겠다


학교 1학년 때 2,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경기에 출전하곤 했다. 처음엔 좋았지만, 그게 나중엔 오히려 독이 됐다.

 

어째서?

 

운동을 늦게 시작한만큼 기술적인 성장 속도에 맞춰서 신체도 천천히 성장시키고, 운동능력도 동반해서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그런데 빠른 시일내에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무리를 하다보니 경기는 많이 뛰었지만, 잦은 부상도 오고, 오히려 나중엔 키도 성장히 더뎠다.

 

부상은 언제쯤이었나

 

무리를 하다보니 중학교때부터 꾸준히 발목이 안좋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스포츠 탈장 수술을 하게됐고, 그 당시 의료진의 실수로 의료사고가 났다. 당시에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 사고 이후 재활도 했지만 결국은 부상으로 꿈을 접게 된 계기였다. 그 후유증으로 추후에 병역 면제 판정도 받았을 정도로 부상 정도가 심각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엔 많이 울었다.

 

보디빌딩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뭐였나

 

축구선수로 뛸 때 남들보다 신장이 크거나 신체적으로 조건이 유리하지 않다보니 몸싸움이나 피지컬에선 강점이 있어야겠단 생각이 컸다. 그래서 기술 훈련 외적으로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접했고, 부상 회복을 위해 스포츠재활을 트레이닝을 하면서 더 많이 접하게 됐다.

 

큰 부상 이후 재활트레이닝의 동기부여가 쉽지 않았겠다

 

아니다. 그전보다 훨씬 더 성실하게 운동했다. 내가 주전일 때 뛰지 못했던 동기들이나 선후배들이 경기장에서 내 자리를 꿰차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보니까?

 

지고 싶지 않아서(웃음). 그리고 스포츠선수의 재활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재활치료와는 상당히 궤가 다르다.

 

 

 


사진=김병정 기자

 

어떻게?

 

당시 인천 집에서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이동한 이후에 9시반부터 저녁 6시, 그 이상으로 꼬박 재활 운동을 했다. 거의 하루에 8~9시간씩. 당시 우상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유벤투스) 선수였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 이씅면서도 트레이닝센터에 가장 일찍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선수로 유명했다.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당신도?

 

그랬다. 그 모습을 본받고 싶어서 오후 6시에 재활 프로그램이 끝나도, 1시간씩 은 꼭 마무리 운동을 더 했다.

 

운동선수로 성장하면서 다져진 내공은 보디빌딩에도 도움이 됐을 것 같다

 

그런면이 있다. 하지만 보디빌딩은 경연이나 표현 같은 부분이 있어서 많이 어려웠다. 또 2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이 운동 자체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이해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정말 똑똑하게 운동해야 하는구나’라는 걸,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는 걸 나중에 알게됐다.

 

인터뷰 2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원익 (one.2@foodnamoo.com) 기자 
<저작권자(c) 개근질닷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등록 2021-04-01 17:50:32 
김원익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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