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일 알자도.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개근질닷컴] 미국의 미식축구 선수 라일 알자도는 80년대 중반까지 상대팀 선수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130㎏ 거구의 거친 수비수이자, 많은 액션영화에도 출연했던 최고의 스타였다. 하지만 스무 살 때부터 복용한 스테로이드로 인해 결국 뇌종양에 걸려 마흔 셋 나이에 요절했다.
알자도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이후 강연과 방송을 통해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을 복용하지 말라’고 특히 청소년들에게 당부했다. 항암치료로 다 빠진 머리에 두건을 쓰고서 말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이런 식으로 죽지 않는 것(No one else ever dies this way)”이라고.
그렇다면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선수들이 약물에 손을 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한 스포츠 잡지에서 국가대표 육상선수들에게 ‘이 약을 복용하면 확실히 금메달을 딸 수 있는 대신 부작용으로 7년 뒤 사망한다. 당신은 복용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결과는 놀랍게도 80%의 선수들이 ‘복용하겠다’고 답했다. 이렇듯 운동선수들에게 성적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식하는 '치명적 유혹'
▲ 아놀드 슈와제네거를 우상시했던 안드레아스 뮌쩌도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서른 하나의 젊은 나이에 ‘갔다’. 사진=SNS 캡처
스테로이드 등의 약물 문제는 국외는 물론 국내 스포츠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스테로이드는 단백질 흡수를 촉진시켜 체지방의 증가 없이 근육을 크게 하고 근력을 높일 뿐 아니라 집중력을 높여준다. 여기에 피로회복 시간을 줄이고, 공격성(활동 의욕)도 증가시키는 효과가 탁월하다.
이 때문에 육상의 필드경기와 단거리, 미식축구, 수영, 스피드스케이팅, 야구와 같이 근력과 집중력이 중요시되는 스포츠 종목에서 오랜 기간 사용자들이 나온 대표적인 스포츠 금지약물이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스테로이드와 성장 호르몬 계열의 금지 약물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종목이 바로 보디빌딩이다.
우리나라 역시 전문 선수들만 금지약물을 썼던 과거와 달리 금지 약물을 찾는 일반 대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코칭 트레이너들이 구해주기도 하고, 온라인 상으로 직접 구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이들 중 일부는 스테로이드 및 금지약물 복용으로 인해 몸에 엄청난 무리가 가해지면서 장기가 망가지는 경험을 겪기도 한다.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다. 해외 사례를 보면 모하메드 베나지자, 마이크 멘쩌, 소니 슈미트, 조니 풀러 등 90년대 최고의 보디빌더들이 스테로이드 과다복용으로 30대에 요절한 기록이 있다. 물론 21세기에도 부작용으로 스포츠 선수, 프로 레슬러, 보디빌더가 사망하는 등 ‘스테로이드에 의한 살인’은 현재진행형이다.
금지약물, 어느새 ‘대중화’가 되다
▲ 사진=식품의약품안전처 제공
가장 큰 문제는 주로 보디빌더나 직업 운동선수들이 사용하던 스테로이드가 최근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8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약사법’을 위반하여 스테로이드 등 전문의약품을 헬스트레이너, 일반인 등에게 불법으로 유통‧판매한 A씨(판매 총책, 36)를 구속하고 B씨 등 배달책 3명(불구속)을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수사 결과, A씨는 2015년 4월부터 2021년 2월까지 5년 10개월 동안 텔레그램 등을 이용하여 총 1만 2,000여 명에게 약 18억 4,000만 원 상당의 스테로이드 등 전문의약품을 불법으로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장에서 적발돼 압수한 스테로이드 등 전문의약품은 73종에 달하고 주사제(엠플, 바이알 등), 정제 등 제형도 다양하며 압수량은 18,000상자에 이른다.
단일 적발된 규모로는 최대로 밝혀진 이번 사태는 스포츠계를 넘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스테로이드 등의 불법약물 구매, 투여가 확산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금지약물을 남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그래픽=권성운 기자
국내 피트니스 대회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에 더해, ‘바디 프로필’ 촬영 등으로 잘 만든 몸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이 SNS등 온라인 상에서 크게 유행 중이다. 피트니스가 하나의 문화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대중들에게 자리 잡은 것이다. 그 결과, 이른바 ‘몸짱’이 되기 위해 스테로이드의 힘을 빌려 근육을 속성으로 키우는 사례가 급증하며 일반인의 약물 남용도 늘고 있다.
무엇보다 ‘마음만 먹으면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은 약물 남용을 가능케 한다.
실제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스테로이드 등의 금지약물은 전문 선수가 아닌 이른바 ‘동네 헬스장’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또 누구나 인터넷 카페, SNS 등을 통해 문의하면 의사의 처방 없이 불법 유통업자로부터 손쉽게 구매 가능하다.
한 피트니스 관계자 C씨는 “이제는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동호인들 역시 온라인상에서 조금만 검색하면 금지약물 구매처를 쉽게 알 수 있는 구조다”면서 “일부 트레이너들이 초기엔 정확한 성분과 부작용 등은 알려주지 않고 단기간의 효과만 강조해서 회원들에게 권하는 사례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후 금지약물의 효능을 접한 이들에게 그 트레이너가 다시 권해서 판매하는 구조다. 운동 코치가 약물 트레이너로 전환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라고 덧붙였다.
요컨대 SNS 등에 ‘몸짱’들이 범람하는 와중에, 이 과정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유혹하는 ‘검은 손짓’들을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금지약물 유통의 구조적인 문제가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헬스장에 다니는 D씨는 “헬스트레이너로부터 스테로이드를 추천 받아서 맞고 있다”면서 “스테로이드나 보충제가 헬스클럽에서 보편화된 지는 오래됐다”고 말했다. 스테로이드 사용자 E씨는 “부작용이 있기는 해도 단기간에 몸이 좋아져서 한 번 손을 대면 ‘마약’처럼 계속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약물 남용은 피트니스 산업 성장의 이면과도 관련이 있다. 보디빌딩&피트니스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 중 상위권 입상자 대부분은 전업 트레이너다. 이들에겐 개인 수상 이력과 자신들이 가르친 제자들의 대회 성적, 즉 커리어 자체가 세일즈의 수단이 된다.
유명 선수이자 트레이너인 한 관계자 F씨는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약물을 사용하는 대다수의 트레이너 겸 선수들에게, 대회 입상과 호성적은 곧바로 수입과 직결된다”라며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많은 트레이너 겸 선수들이 약물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유롭지 않은 면도 있다”고 귀띔했다.
4년간 헬스클럽을 다닌 G씨는 “헬스장을 다니면서 트레이너로부터 스테로이드 주사 투약을 권유 받았다”면서 “본인에게 개인 지도를 받는 회원의 몸이 좋아지면 홍보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피트니스 업계가 대중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고 연봉이 수억원에 달하는 선수 출신 스타 트레이너, 피트니스 인플루언서들이 다수 나오면서 이를 동경하는 이들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이처럼 ‘승자 독식’의 세계에서 우승과 SNS 등을 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망에 편승해 금지 약물은 우리 곁에 뿌리 깊이 똬리를 틀었다.
‘끔찍한’ 스테로이드 부작용 사례
▲ 그래픽=권성운 기자
스테로이드 등 금지 약물이 널리 유통·사용되면서 부작용 사례도 기하 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전 보디빌딩 국가대표 코치 출신의 지도자 H씨는 “나와 인연을 맺었던 선수 가운데 2명이 훗날 심장 관련 질환으로 목숨을 잃었다”면서 “보디빌딩계에서 반드시 금지약물을 퇴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수이자 헬스 관련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I씨는 “실제 대회장에 가면 화장실에 빈 주사기들이 가득하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금지약물을 하고 나서 좋은 성적을 받고, 유명해진 이들은 자주 접할 수 있지만 부작용으로 사라진 선수들은 우리가 접할 수 없다. 왜 그런지 아는가”라고 되물은 이후 “그들은 조용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주변에 금지약물을 정확한 처방 없이 오남용 한 이들 중에 근육이 괴사하거나, 운동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없는 이들을 보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보디빌딩 업계에는 웃지 못할 씁쓸한 이야기도 있다. 예전에는 오랜 도핑 노하우를 쌓은 베테랑 선수들을 통해 비교적 안전한 도핑 방법이 전수되었다면, 최근에는 급격한 확산으로 최소한의 지식조차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 더 심각한 ‘최악의 상황’에 노출돼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과거 역시 수많은 도핑 피해 사례가 있었지만, 단지 수면 아래 있었기에 파장이 크지 않았을 뿐이다.
트레이너로서 헬스장을 운영했던 J씨는 “함께 운동했었던 주위 사람 중 스테로이드를 장기 복용했던 사람들은 40대에 몸이 반쪽이 됐고, 성기능이 거의 없어졌다”면서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고 증언했다.
10년간 스테로이드를 사용하며 운동을 하고 있는 K 씨는 “여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스테로이드를 쓰기 시작했다. 내추럴(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사례)로는 근육을 키우는데 한계가 있었다”며 “그런데 지속적인 사용으로 고환이 작아지고 가슴이 간지러운 부작용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패혈증으로 근육이 부풀어 죽을 뻔한 적도 있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금지약물을 멈춰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 사진=언스플래쉬
생리학 전공 김찬 박사에 따르면 스테로이드는 장기 사용 시 호르몬 시스템, 근골격계, 심혈관계, 간, 피부, 감염, 정신효과 등에 걸쳐 20여 가지의 건강문제를 불러온다.
호르몬 시스템에서 남성은 불임, 유방발달, 고환위축, 대머리, 여성은 외음부 변화, 남성형 탈모, 체모 증가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심혈관계에서는 LDL 콜레스테롤 증가, 혈압증가, 심정지, 좌심실 비대 등을 일으키며 분노와 공격성, 조증, 판단력 저하 등 정신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성장기 아이들의 경우는 성장판이 닫혀 저신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
금지약물 부작용으로부터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미 사용 중인 경우엔 즉시 중단하고, 사용 중 부작용을 경험했다면 즉시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 무엇보다 병원이나 약국이 아닌 곳에서 스테로이드 등 금지약물을 구매, 사용하지 말아야함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스테로이드가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손쉽게 근력을 키우려는 욕심에 기인한다. 또한 ‘부정한 방법’을 촉매로 해, 자신의 건강마저 담보로 해서 욕망을 이루려는 마음도 한 몫 할 것이다.
하지만 보기에 좋은 몸을 만들려다가 정작 건강을 해친다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무분별한 약물 사용에 앞서 ‘왜 운동을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먼저 이뤄진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다.
▲ 사진=식품의약품안전처 제공